【행복할 권리】 사숙, 우리 똥스님, 똥이 밥이 되고 밥이 똥이 되고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4.03.22 09:00 의견 0

내겐 잊지 못할 스승이 있다. 그 분은 똥스님이라 불리던 사숙 스님이셨다. 흙에서 배워라, 하시던 내게 농사를 일러주시던.

농협에 신청한 퇴비가 왔다. 그러나 절 올라오는 길을 올라오지 못하고 마을에 퇴비를 내려다 놓고 갔다. 절을 오르내리며 쌓인 퇴비를 보고 '저거 올려야 하는데'하다 똥스님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지금은 모종 낼 때 거의 상토로 한다. 모판에 상토를 깔고 고추 씨나 볍씨를 한알한알 넣으면 떡잎, 싹이 나고 모종이 되는 거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다. 쌀 미정을 하고 볍씨를 깐, 껍데기를 불에 태웠다. 그리고 그 볍씨 재를 태운 재거름으로 사용해 고추모종도 하고 못자리에 재거름을 뿌려 볍씨도 싹을 튀우게 했다. 이 빈 껍정이, 쭉정이 볍씨 껍데기를 태울 때 그냥 불을 놓으면 훌훌 다 타버려 재가 많이 남지 않는다. 이 재거름은 고추씨며 볍씨를 소독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거름재를 만들기 전에 볍씨 껍데기에 양잿물을 뿌려 주는 거였다.

재란, 불에 타고 남은 찌꺼기다. 재거름을 만드는 건 우리네 전통방식이었다.

먼저 빈 껍데기 볍씨를 불을 붙이고 불을 덮었다. 그리고 연통을 하나 꽂아 놓는다. 그 불이 커지지 않게 양잿물을 뿌리고 속에서만 살살 타게 연소조건을 나쁘게 해 거름재를 만들어 사용했던 거였다.

"똥 푸러 가자."

"네, 스님."


사숙스님의 말에 의하면 내가 머물던 관음암의 해후소는 천하제일명당터라고 했다. 뒷깐에 앉아 내다보면 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보였다.

그렇게 때가 되면 사숙스님이 측간에서 나를 불렀다.

처음엔 코를 막고 기절초풍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자 나도 제법 똥지게를 지게 될 줄 알았다.

"으으."

"니 속이 더 더럽다, 이놈아. 똥이 밥이 되고 밥이 똥이 되는 거라고. "

똥뚜깐에서 곤혹스러워 하던 나를 보고 노스님이 그랬다. 노스님은 평상시에도 절 마당의 풀을 뽑은 것들이며 낫질한 풀들을 거름장에 가져다 모아두곤 했다. 산 밑 마을에서는 소똥으로 거름을 내지만 산에서는 황금똥을 사용하는 거였다.

"우리 모두 다 흙으로 돌아 갈 거야."

산에서 낙엽들을 지게의 바수구미에 담아와 거름 낼 곳에 깔고 그 위에 똥을 펼쳐부었다. 그리고 다시 낙엽들로 켜켜이 쌓는 거였다. 거름내는 방식이었다.

그랬다. 삶의 기술이 부족해 때로는 잘못 살기도 했다. 하여 잘못된 길을 돌아나오기도 했고 길을 잃어 어정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헤매면서 살아온 날들이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마음밭에 거름을 주어야 꽃도 피고 열매도 튼실하고 봄도 오는 것이다.

이제 내가 사숙스님의 나이가 되어 거름냄새를 맡으니 이리 향기로울 수 없다. 용하게 아직까지도 살아남은 봄, 봄은 거름냄새로 부터 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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